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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공략

킬링 마이셀프(Killing myself)-Episode 01. 깨진 거울상

by :클로슈: 2024. 10. 14.

※ 선택지만 올려서는 전체 맥락을 알 수 없기에 부득이하게 게임 내 스크립트가 상세하게 포함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으신 분들은 페이지를 열지 말아주세요)

-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디폴트 네임인 '은아'로 작성되며 독백은 괄호 처리하였습니다.

- 등장 캐릭터들의 대사처리는 게임 메인페이지에 등장하는 각자의 상징 색깔대로 작성됩니다. 대사 구분을 위해 색상을 칠하니 가독성이 떨어지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본 이미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 킬링 마이 셀프 게임설명 대표 이미지

 

Episode 01. 깨진 거울상

 

...당신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나요? 물론 거짓말을 하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하죠. 나 자신을 우습게 만들지 않을 기억력, 담대함... ...역설적이게도 거짓에 가장 필요한 건,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사건에서, 어떤 사실을 비틀어, 그럴싸한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속이고, 상대를 속이고, 현실을 속이죠. 하지만, 흐트러진 수많은 현실속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어요.

 

가장 혐오스러운 거짓말은,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거짓이라고.

 

...이 세상에는 평범한 사람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라고 불리는 사람들. 마치 연예인과도 같은 에스퍼들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지만 능력을 발산하는 만큼, 능력의 반작용을 스스로에게 쌓아갔다.

 

과도하게 쌓인 반작용은, 에스퍼들에게 과부하를 일으킨다. 과부하를 해소하지 못한 에스퍼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이킬 수 없을만큼 자신의 능력을 폭주시킨다. 폭주된 능력은 사람을 해치기도 했고, 에스퍼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가이드들이 필요했다. 자신의 힘을 건네, 에스퍼들의 반작용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자들. 손을 맞잡고, 힘을 건네는 가이딩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가이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었지만 에스퍼에 비해 그 수가 적었다. ...눈에 띌 정도의 불균형이 있는 그 관계 속에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용을 지불해, 능력을 거래하는 기묘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오로지 강함의 척도에 따라 구별되는, 능력자들의 세상에서 S급 가이드인 나는 완벽한 존재였다.

 

...안나, 26.

 

모든 에스퍼들과 최고의 가이딩 효율을 가진 S급 가이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살다, 갑자기 대중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 수많은 에스퍼들의 구애를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유명인. 유명인으로의 삶을 누리며, 쏟아지는 애정과 선망을 온몸으로 받는 삶. 완벽하게 부유하고 명예롭던 나의 인생은 내 손으로 얻어낸 최고의 인생이었다.

 

내가.

 

...내가? 그 여자를 죽여냄으로써 얻어낸 인생.

 

내 진짜 이름은 은아, 24. 가이딩 센터에서조차 아무도 찾지않는 D급 가이드. 하루 방문객이 10명도 안되는. 변두리의 가이딩 센터에 갇혀 모두에게 잊혀진 존재와도 같이 살아가던 존재. 누군가는 가이딩의 감각이, 가이드와 에스퍼 모두에게 쾌감과도 같다고 했지만 나는 피로감외의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했다. 매일 가이딩 센터에 의미없이 출근하고, 갱신되지도 않는 접수 테이블을 바라보고 권태로운 삶에 갇혀, 의미없는 가이딩 행위를 반복하며 살아가던 중-

 

우연히, 안나라는 여자를 만났다.

 

422.

나는 야간 당직 근무 일정을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모를 위급 상황- 에스퍼의 폭주에 대비하기 위해 가이딩 센터에서는 소속 가이드들이 돌아가며 종종 당직을 서곤 했다.

 

은아: 하필 오늘이네.

 

오늘은 좀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은데...

은아: ... 피곤하다...

 

나는 괜히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 같아, 이마를 짚었다.

 

은아: 집에 가고 싶은데...

 

나는 괜히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차피 당직인거, 좀 열심히 해볼까.

은아: 그래도 힘내서...!

 

나는 모처럼 힘 내려고 했지만-

 

은아: ...힘내봤자...

 

괜히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힘이 빠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이딩 센터 생활은 최악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생긴 국가 기관. 사회의 안전을 위한 축복받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허울 좋은 말들로 포장되며 폭주를 막기 위한 수단인 가이드로 평생을 살아야했다.

 

가이드 센터에서 일하거나, 누군가의 전속 가이드가 되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그랬고, 일반적인 삶이라는 것이 그랬다.

 

열아홉 살에 능력이 발현된 나도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무 살이 된 그해부터, 가이딩 센터에 근무했다. 그렇게 시작된, 반복되는 일상, 반복되는 가이딩.

 

가이드 생활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었을 때도 있었지만 가이딩을 포기한 가이드가, 세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가이드라는 사실이 들키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언젠가는 누군가의 전속 가이드가 되어 센터를 떠날 날을 꿈꾸기도 했지만 D급을 전속 가이드로 원하는 에스퍼는 없었다.

 

별 볼일 없는 가이드와, 별 볼일 없는 에스퍼의 건조한 접촉. 그런 삶 속에서, 점점 남들의 행복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능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부러웠고 그 다음에는, 전속 계약을 맺어 가이딩 센터를 떠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조금만 더 능력있는 가이드였다면 내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권태에 빠졌고 가이드로만 평생을 살아야하는 그 불합리한 구조와 아무런 성공도, 행복도 줄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능력을 저주했다.

 

은아: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대충 시선을 멀리 던지자 퇴근을 준비하는 요한이 보였다.

 

...인사라도 할까?

그를 바라보며, 인사를 고민하는 순간-

 

요한:......! 은아씨, 오늘 야간 당직이시죠?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살가운 미소를 띄며 말을 건넸다.

 

...꽤 피곤하네요.

은아: ...당직 일정표 확인 안하시나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으세요?

은아: ..., 꽤 피곤하네요. 그래도...어쩔 수 없죠, .

 

요한: ...하하.. 오늘 꽤 피곤해 보이시네요.

은아: 가이드 생활이 다 그렇죠, . ...... 조금 다를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나는 뒷말을 겨우, 속으로 삼켰다. 은요한, 센터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A급 가이드. ...그정도의 능력이면, 언제든 전속 계약을 맺어 이 쳇바퀴같은 삶을 언제든지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센터 소속을 고수했다.

 

요한: 아무튼, 너무 무리하시지 마시고 오늘 조금 일찍 마무리하시고, 들어가서 푹 쉬세요.

은아: ... 그래야죠.

요한: ...은아씨.

은아: ?

요한: 너무 그렇게... ... 늘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아서... ...어떻게 말을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은아: ...?

요한: 그냥... 힘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별 응원은 안되겠지만.

 

조금 눈을 찡그리면서 웃은 그는, 머쓱한듯 머리를 조금 만졌다.

 

요한: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그는, 빠르게 센터 문을 나섰다.

 

모른 척하자...

은아: ...

괜히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은요한, 센터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A급 가이드. ...그정도의 능력이면, 언제든 전속 계약을 맺어 이 쳇바퀴같은 삶을 언제든지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센터 소속을 고수했다.

 

(여기저기 친절하게 말이나 걸면서 다니고... ...나한테는 좀 피곤한 사람이야.)

 

그는 늘 상냥했고, 웃는 얼굴로 모든 사람을 대했다. ...분명 괜찮은 사람이지만, 오늘은 좀 피곤해.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사람도 안올 것 같으니까... ...조금 일찍 마무리나 해야겠다.)

 

몇 시간 뒤, 늦은 밤.

 

센터 야간 운영 종료시간보다 30분 빨리, 나는 마감 준비를 시작했다. 천천히 일어나, 우선 문을 잠궜다. 불을 끄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

 

누군가 주먹으로, 잠긴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 도와주세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어떤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알 수 없는 여자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손님-

 

...나조차 착각할 정도로, 나와 닮은 얼굴이었다.

 

완전히 깜깜해진 바깥에 그녀가 서있었다. 나와 완전히 닮은 얼굴을 한 여자. 그녀는 울며, 잠긴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system] 집중하세요! 당신의 모든 선택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문을 열어주자.

은아: 일단, 들어오세요.

 

나는 닫힌 문을 열고,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녀는, 다리를 절며 센터 안으로 들어왔다

 

???: , 감사합니다...

 

은아: ....저기 혹시-

 

그리고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어디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문을 열어주면 안될 것 같은데...

은아: ..., 무서워...

 

나와 너무 닮은 얼굴에,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며 나는 뒤로 물러섰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녀는 닫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마치 우는 듯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어 센터에 찾아왔는지. 온전하지 않은 발음으로 몇 가지 얘기를 했다.

쫒기고 있다, 무섭다, 불안하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 이 사람...)

 

완전히 미친 사람 같잖아...!

나는 미친 것 같은 그녀에게서, 기이한 공포감을 느꼈다.

혹시 폭주 직전의 에스퍼...?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폭주 직전의 에스퍼와도 같았다.

정말 위험한 상황인 것 같은데...

권태로운 삶을 살아오던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런 위험에 있는 것 같았다.

 

은아: , 도대체 무슨 일이...

 

경비실? 경찰? 누구를 불러야할지 고민하는 찰나 작게 쿵, 소리를 내며 그녀는 쓰러졌다.

 

다음 날, 나의 집.

나는 새된 숨을 뱉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은아: ...정말....나랑 너무 똑같이 생긴 거 아냐...?

 

몇 시간 전, 센터의 치료실.

 

나는 쓰러진 그녀를 침대로 옮겼다. 까진 발, 긴장된 근육... 그녀는 먼 곳에서 도망쳐 온 것처럼 보였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도망쳐야 했을까?

 

나는 문득, 그녀가 폭주 직전의 에스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센터의 검사 도구를 이용해, 그녀의 능력 형질 검사를 시작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까...?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내 손에 쥐어진 건, 그녀가 가이드라는 검사 결과였다.

 

나와 똑닮은 그녀는, 아직 세간에 알려진 적 없는 S급 가이드였다.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강요하는 이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이렇게 큰 힘을 가진 S급 가이드가 알려지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몇 번이고 검사지를 읽고 몇 번의 재검사를 시도했지만 검사 결과는 정확했다.

 

그렇게 다시 오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녀가 힘겹게 내뱉은 그 부탁을,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절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다시 며칠.

그녀는 정신을 차렸고, 나와 몇 가지 대화를 나눴다.

 

안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자신을 안나라고 소개한 그녀는,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가이딩 능력을 알고 있었고, 그 능력이 줄 호화로운 삶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성공적인 삶이 싫어,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이목을 받고, 집요한 욕구를 온몸으로 받는 삶.

 

...권태로운 인생과는 다른...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숨어있는 안나가 미웠다.

 

...어째서 저런, 재능을...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저렇게 사는 거야?

 

...이글거리면서 차오르기 시작한 그 생각은... 끝내 내 마음을, 내 이성을 집어 삼켰다.

 

58.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센터 근무를 마친 뒤 집에 돌아왔다. 안나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안나: "다녀왔어?“

 

밝은 목소리가 꽤나 거슬렸다.

 

은아: ...있잖아, 안나. 언제 돌아갈거야? 이제 몸도 괜찮아진 것 같고.. 꽤 오래 우리 집에 있었잖아.

 

노골적인 내 말에, 안나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내 눈치를 조금 살피던 안나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안나: 미안해...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것도 아는데... ...네 삶이 부러워서, 여기 계속 있고 싶어.

 

안나의 밝은 목소리가, 내 귀에 조금 울렸다.

 

은아: ...?

 

뜻을 알고 싶지 않은 그 말에, 무언가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은아: 무슨 뜻인데, 그게...

 

꽉 쥔 주먹이, 분노로 잘게 떨렸다. 나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며, 옅게 웃으며 말하는 안나가 ...마치 나를 기만하는 것처럼 역겨웠다.

 

은아: 나는 네가... 부러운데.

 

내뱉어진 나의 목소리가 낯설만큼 떨렸다.

 

안나: ...부러워? 난 내 능력이, 저주라고 생각하는데.

은아: ......?

안나: 그렇잖아, 평범하게 살지 못하게 되니까.

 

안나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안나: 그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고, 그냥... 평범하게 센터에 다니고...평범한 사람들과 얘기하고, 에스퍼들의 관계에 위협을 받지도 않고... 난 너같은 삶이 꽤 부러운데.

은아: ...너는... 너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잖아...

 

분노, 질투, 원망...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무자비하게 섞여, 이성을 마비시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안나의 뒤로 오래전, 선물 받은 화분이 보였다.

 

...가이드 센터 입사를 축하하며, 받은 화분.

 

그때는 기뻤어. 작은 내 능력이라도 인정받았다는 게.

 

하지만, 그저그런 가이딩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마치 화분에 갇힌 식물의 뿌리처럼. 그 빌어먹에 작은 화분이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삶인 것처럼.

 

...내가 만약 이 삶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더라면...

 

은아: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줄 알아? 나도... 나도 너처럼만... 나도 너만큼만 되었으면...!

 

...나는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쥔 화분으로 안나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렇게 말할 거면. 그렇게 살 거면, 그 능력, 그 인생. 나에게 줘.

 

그리고, 59.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던 자정. 나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미친듯이 땅을 팠다.

아주 깊은, 모든 죄가 묻힐 만큼 깊은 구덩이.

 

...그리고 안나, 그 땅에 묻었다.

 

메워진 땅 앞에 서서, 나는 비를 맞으며 한참을 기도했다. 안나에 대한 사죄, 그녀의 죽음에 대한 명복. ...그리고 그녀의 삶을 훔친 나에 대한 동정. 일그러진 감정으로부터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이제 영원한 비밀을 가지고, 영원한 거짓을 가져야하는 나를 위한 눈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지만 괜찮았다. 땅에 묻힌 그녀와 함께, 더 불쌍했던 내 과거도 사라질테니까.

별볼일 없는 능력도, 지긋지긋한 센터도 이제는 이별이다.

 

...나는 그 누구도 모르는, 안나의 인생을 훔칠 것이다.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안나의 삶을 살 것이다.

 

나는, 나는...

 

은아: , 나는... ... 다시 태어난 거야... 그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난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내리던 비가, 점차 잦아들었다. 나는 얼굴을 대충 문질러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그녀를 묻은 곳에서, 걸음을 돌렸다. ...돌아서는 내 발끝에, 무언가 밟혔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웠다.

 

...넥타이핀?

 

은아: 설마... 안나가 손에 들고 있던....

 

어째서 이것이 그녀의 손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물건, 아니 증거,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넥타이핀을 손에 쥐었다.

 

...지금 이것이, 나의 눈에 띄어서 다행이야. 알 수 없는 넥타이 핀을 마지막으로 지금의 상황을 증명할 것은 이 세상에 남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나는 안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Episode 01. 깨진 거울상 End